「2・8독립선언서」

3.1독립 운동의 도화선이 된「2.8독립선언」


 4년에 걸쳐 싸운 제1차 세계대전이 1918년에 종료, 미국 대통령 윌슨이 강화 원칙의 하나로 제창한 「민족 자결 주의」는 독립 국가를 가지지 못한 민족에게 큰 용기를 주었습니다.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은 국내외의 지도자들과의 정보 교환과 국제 정세를 통하여 민족 독립 운동에 최적의 시기라고 판단, 감시가 엄격한 가운데에서도 연말부터 새해에 걸쳐 다양한 명목을 붙인 회합을 가지고 그것을 위한 구체적인 준비를 진행해 갔습니다.

 도쿄가 30년만의 큰 눈에 뒤덮인 1919년 2월 8일, 중심 멤버들은 아침부터 집합, 일본어와 영어로 번역되어진 독립 선언문, 결의문, 민족 대회 소집 청원서를 일본의 귀족원, 중의원의 의원들, 정부요인, 각국 주일 대사, 내외 언론기관 앞으로 우송했습니다. 이날 오후 2시부터, 재일본도쿄조선YMCA(현재의 재일본한국YMCA―이하YMCA)의 강당에서「조선 유학생 학우회 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회장은 시작되기 전부터 수백명의 유학생으로 열기가 가득했습니다. 총회의 개회 선언, 개회 기도가 끝남과 동시에「조선청년독립단」을 결성하려는「긴급동의」의 소리가 높아져, 사전에 독립단 대표 11명의 서명이 적힌 독립 선언문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습니다. 경찰관들이 난입해, 지도 멤버들의 일제 검거가 시작되어, 사명을 가지고 일본에서 탈출한 2명을 제외한 대표 9명이 체포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뒤를 이어, 제2, 제3의 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사건」은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보도되어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또한 선언문은 서울에 전해져 3・1운동을 일으킨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당시의 YMCA회관
 3월 1일, 조선에서 3・1독립 운동이 시작되자 많은 유학생들이 조선의 고향에 돌아와 운동의 전개에 적극적인 역할을 해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운동은 중국의 5.4운동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습니다.

 당시의 YMCA 총무 백남준은 체포되었던 유학생들을 위해 면회와 음식물의 차입 등 헌신적으로 일했습니다. 또한 조선의 독립을 이해하는 일본의 지식인들에게 지원을 구하여, 하나이 타쿠조, 후세 타츠지를 비롯한 탁월한 변호사들이 맡았습니다. 그들의 변호는 엄격한 내란죄를 적용하려고 한 검사의 논고를 논박하여, 결국 출판법 위반이라고 하는 가벼운 죄를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1독립 운동 후, YMCA를 「독립 운동의 근거지」로 본 일본의 관헌은 YMCA를 일본 기독교 교회의 관리하에 두려고 했으나, 유학생들의 저항, 요시노 사쿠조들의 호된 비판에 직면하여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우치무라 간조가 교우 관계로 교제했던 단 한명의 조선인이라고 평해지는 김정식 초대 YMCA총무와의 교류, 요시노 사쿠조가 친우라고 칭한 백남준 총무와의 교류 등, 어려운 불행의 시대의 한 가운데라도 정의와 평화를 구하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훌륭한 교류가 있었던 것을 우리들은 기억하고 싶습니다.